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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배터리의 재활용

전기차 배터리 재사용의 시대

     

제주 e-고팡 충전 스테이션 구축 case

바야흐로 전기차 10만 대의 시대입니다. 2019년 상반기까지 국내에 판매된 전기차의 숫자는 총 8만1,000대가 넘습니다. 올해 지원 예정인 보조금의 규모가 5만 대를 넘는 것을 생각하면, 연말까지 10만 대를 기록하는 것은 단지 차량수급의 문제일 것으로 보입니다. 성능과 가격에서 경쟁력을 갖춘 차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전기차의 보급은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전기차가 굴러다니게 된다는 것은 새롭게 고려해야 할 문제도 함께 늘어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배터리’입니다.

제주도에 구축한 e-고팡 충전 스테이션

배터리의 성능 향상과 전기차의 재상품화

국내에 전기차가 본격적으로 판매량을 늘리기 시작한 것은 보조금 제도가 가동되기 시작한 2015년부터입니다. 100km 남짓의 거리를 달리던 초창기 전기차를 넘어, 이제 400km를 달리는 차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당연히 배터리 성능이 향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래 차트를 보시죠. 약 20개월마다 30%씩 배터리 용량이 늘어납니다. 차는 그대로인데 배터리의 성능은 급격하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4년 정도면 같은 차인데 주행거리가 두 배 차이가 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초창기 선보인 BMW i3 같은 차가 바로 좋은 예입니다.

BMW i3의 배터리 별 주행거리. 배터리의 성능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면서 같은 차가 더 먼 거리를 달리게 된다

이런 배터리의 고성능화는 단순히 전기차의 성능만 높이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전기차의 소유 행태가 바뀌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전기차에서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특징은, 엔진차에 비해 그 생애주기가 매우 길다는 점입니다. 전기차는 엔진이 없습니다. 엔진이 없다는 것은 자동차의 노후화를 촉진시키는 열과 진동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냉각과 윤활을 위한 주기적인 정비도, 브레이크 패드 같은 소모품의 잦은 교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5년째 같은 전기차를 운행하고 있는 저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별다른 정비를 받은 적이 없음에도 주행성능은 출고 때와 다르지 않으며, 실내는 아직 잡소리 하나 없습니다.  엔진에서 해방된 자동차는 그냥 달리기만 쾌적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내구성까지 높습니다.

배터리 교체 시장의 활성화는 전기차의 소비패턴을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전기차에서 유일하게 성능이 하락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배터리 말입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전기차 제조사는 16만km를 주행한 차의 배터리 성능이 출고 시점의 70%선을 유지할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보유기간이 길어질 수록 배터리의 성능하락을 경험한 소비자가 보다 높아진 성능의 배터리로 교체하려 할 것은 자명합니다. 주행거리가 좀 짧아진 것만 빼면 차는 '멀쩡'하거든요.

이 같은 이유로 배터리 교체 시장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배터리 교체는 목돈이 드는 작업이 될 것이기에, 직접 소유보다는 리스 같은 금융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질 공산이 큽니다. 금융을 통한 재상품화를 통해 전기차가 다시 생명을 늘여가는 과정은 전기차의 '친환경적' 요소와도 완벽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전기차는 아예 처음부터 소유가 아닌 금융상품으로 소비되면서 자동차의 소비패턴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터리 교체 시장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자, 이제 전기차가 새 배터리를 달았습니다. 그럼 교체되고 남은 중고 배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기차의 높은 배터리 안전기준

리튬이온 배터리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바로 떠오르는 것은 배터리에서 리튬이나 코발트 같은 희귀금속을 다시 추출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환경과 경제성 양면으로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6만km를 달린 70% 성능의 배터리는 계속 차에서 쓰기에는 애매한 물건일 지언정, ‘폐배터리’라고 부르기에는 여전히 높은 성능을 냅니다. 그 자체로 훌륭한 에너지 저장장치(Energy Storage System, 이하 ESS)로 사용할 수 있거든요. 닛산이나 테슬라 같은 이 시장의 선도자들이 괜히 중고 배터리로 가로등이나 가정용 태양광 발전 저장장치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테슬라의 중고 배터리 활용 프로그램인 Powerwall. 가정의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로 발전한 전기가 여기에 저장된다

전기차 배터리가 ESS로 사용하기 좋은 이유는 성능 말고도 안정성 때문입니다. 이미 시판용으로 높은 경제성과 생산성을 가진 ESS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화재의 위험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빈발하는 화재로 많은 ESS의 가동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전기차 배터리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닛산의 xStorage 프로그램

국내에서 팔리는 전기차의 배터리팩은 ‘자동차 안전기준 시행세칙 - 구동축전기’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2009년도에 대한민국이 세계 최초로 만든 시험기준입니다. 이 기준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 과격함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900도의 불에 태우고, 소금물에 담그고, 150%로 과충전하고, 4.9m 높이에서 패대기를 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친 배터리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일반 ESS에 사용되는 어떤 배터리팩도 이런 가혹한 상황을 견뎌내도록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기차 배터리팩은 셀 직접 냉각과 히팅을 하도록 만들여져 있습니다. 항상 최적의 상태에서 높은 성능을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중고일지언정 전기차 배터리는 지금의 상업용 ESS 배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안전성을 가지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제품입니다.  재활용을 위해 일부러 해체할 필요가 없으며,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효율과 안정성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밀집도가 높은 도시의 ESS라면 안전을 위한 선택이 될 수 있으며, 재활용을 통한 자원 가치사슬까지 만들어 냅니다.

전기차 배터리 재활용 ESS의 가능성, 제주 e-고팡

얼마 전 제주도에서 ‘e-고팡’이라는 충전스테이션이 문을 열었습니다(고팡은 제주 방언으로 ‘곳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에너지 전문기업 KCSG와 BMW가 협업해 만들어낸 이곳에는 최대출력 250kW의 독립운전이 가능한 중고전기차 기반 ESS 시스템과 함께 3대의 50kW 급속충전기와 5대의 7kW 완속충전기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e-고팡 컨테이너의 내부. BMW i3의 중고 배터리를 활용하여 만들어졌다

e-고팡 ESS의 속에는 단위용량 22kWh의 상태가 천차만별인 i3 배터리 10대분(총용량 220kWh)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10대나 되는 i3의 중고 배터리를 구했나 했더니, 그 과정이 다이내믹 합니다. 원래는 제주TP 폐배터리 재활용센터에 회수된 배터리를 활용할 계획이었지만, 10대나 되는 i3 배터리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더군요.

i3 10대분의 중고배터리를 확보하여 사용했다

그래서 BMW 코리아가 직접 나섰습니다. 성능이 높아진 신형 33kWh 배터리 10대분을 준비한 다음, 제주에 거주하는 구형 i3 소유자 10명을 추첨해 무상으로 신품 배터리로 교체해주는 ‘두꺼비야 새집 줄께’ 이벤트를 진행했답니다. 전기차가 보급되기 시작한 지 고작 몇 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고 배터리를 구하기 위해 벌인 고육지책이라는군요.

BMW i3 중고 배터리 10대를 사용해 전기차 충전기용 ESS를 만들었다

이 스테이션의 충전기가 모두 작동할 경우 전력부하는 185kW에 이릅니다. 하지만 정작 한전에서 끌어쓰는 외부 전력은 74kW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 74kW냐구요? 대한민국의 법을 준수하기 위해서입니다. 현행 전기사업법은 일반용 전기설비가 600V 75kW를 넘을 경우 전기안전관리자가 반드시 '선임'되어야 합니다. 사용전 검사와 고정 인건비가  발생하며, 이것은 충전비용 상승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할 법입니다만, 24시간 무인으로 운영되는 전기차 충전소의 속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인력상주와는 별개로 충전소와 ESS는 센터를 통한 원격 모니터링이 상시 가동됩니다)

또다른 이슈는 '한정된' 전기자원입니다. 다수의 급속충전기를 상시 운영할 전력을 몽땅 한전에서 끌어오려면 전기기본요금이 매우 높아지게 됩니다. 사업의 영속성을 추구하는 충전사업자로서는  이걸 어떻게든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급속충전기 다수가 가동하게 될 때 해당 지역이 받을 전력망 부하도 문제가 됩니다. 350kW급 초급속 충전기의 상용화가 거론되고 있는 현재, 가능한 적은 자원으로 다수의 급속충전기를 운영하기 위해서 ESS는 필수라 할 수 있습니다. 충전기들이 쉴 때는 충전을 하고, 충전기들이 바쁠 때는 방전을 합니다. 혹시라도 배터리가 다 소진되면, 충전기들의 출력제어를 통해 총출력 74kW를 유지하는 식이지요. 피크제어는 물론 한정된 전기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라도 ESS는 충전소와 함께 다니는 필수장치가 될 것입니다. 

e-고팡 시스템의 특징들. 중고 전기차배터리는 의외의 장점도 가져온다

게다가 기존 ESS 대비 장점도 있습니다. 일단 '작습니다'. 점유 공간이 1/3밖에 되지 않으며, 소형 컨테이너에 모든 기능을 몰아넣은 올인원 방식이라 어디든지 옮겨서 즉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온도, 습도 등 환경변화에 견디는 재난 안전성은 이게 전기차 배터리를 활용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원래 전기차 배터리다 보니 높은 율속으로 충방전을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전기차 배터리 ESS의 미래

전기차 배터리 기반의 ESS는 활용처도 무궁무진합니다. 단순히 전기차 충전용도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공동주택의 보조전원, 도심 충전소의 피크저감, 분산전원 잉여전력저장, 마이크로그리드로 활용하는 소규모 ESS의 용도로도 활용이 가능합니다. i3 배터리의 첫 활용 케이스였기 때문에 배터리제어를 위한 도입기술을 활용했지만, 기술의 파악이 끝난 현재 전체 시스템의 국산화도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중고 배터리를 이용한 패키지 솔루션으로 개도국 비전력화 지역의 전원으로 활용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습니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은 전기차 운영 초기 국가들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있습니다. 현행 보조금 체계에서 떼어낸 중고 배터리는 보조금을 지급한 지자체의 소유로 귀속됩니다. 배터리를 재활용하는 과정은 지자체와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각 지자체가 배터리 활용방법에 대한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만, 아직 이것이 가능한 곳은 제주도 뿐입니다. 당장에 배터리를 떼어 반납하겠다고 해도 대부분의 지자체는 손사래만 치는 실정입니다. 누군가는 의지를 가지고 달려들어야 할 부분입니다.

충전이 전력망에 스트레스만 주는 대신 조절이 가능한 에너지 효율화 자원이 되게 하겠다는 점만으로도 e-고팡 스테이션은 훌륭한 스마트시티 에너지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쏟아져 나올 중고 전기차 배터리를 활용할 길을 해외 제조사와 지자체, 그리고 대한민국의 중소기업이 협업해 만들어낸 멋진 실증 모델입니다. 이 사업 모델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국에 출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변성용(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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